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탈린그라드 전투 (문단 편집) === [[소련군]]의 대응 ===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xternal/orientalreview.org/ilw04681.gif|width=100%]]}}} || [[스탈린그라드]]라는 도시는 [[이오시프 스탈린]]의 이름이 직접 붙은 도시[* 그 외에도 스탈린의 이름을 딴 지명은 많았지만, [[러시아 내전]] 시기 남부 지역에서 식량 조달 조직 책임 인민위원으로 임명된 스탈린이 식량 공급을 안전히 하기 위해서란 명목으로 처음으로 유의미한 군사권을 행사한 지역이 바로 이곳이었다. 그는 차리친(제정 시절 명칭) 사령부에서 북캅카스 전선을 지휘하며 모스크바에서 [[레프 트로츠키]]가 귀찮은 간섭을 하는 것 이외엔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출처: 《스탈린:강철 권력》 14장 '내전 속으로', 로버트 서비스]인지라 그 상징성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또한 도시 자체가 상당히 큰 산업 도시인 데다[* 소련군 군수 산업 생산량의 4분의 1을 담당했으며, 소련군 주력 전차 [[T-34-76|T-34]]의 주요 생산 기지 중 하나였다.] 독일군 입장에선 이곳을 점령하지 못하면 캅카스로 진격 중인 A집단군의 안전을 도저히 확보할 수 없어서 사실상 분단되는 셈이었다. 따라서 소련군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스탈린그라드를 절대 사수한다는 방침을 세웠고 패퇴하던 부대를 수습하여 62군으로 재편성하고 근처 64군과 합류하여 스탈린그라드 방면군을 편성, 독일군의 공세에 대비하도록 했다. 또한 스탈린그라드는 현재의 명칭인 [[볼고그라드]]에서 알 수 있듯이 [[볼가강]]에 위치해 있는데, 이 볼가강은 모스크바 북서쪽에서 시작해서 남동쪽으로 흘러 [[카스피 해]]로 들어가는 강으로서 캅카스 지방의 유전에서 생산되는 석유를 비롯한 소련 남방의 자원을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한 공업 지대로 운반하는 중요한 통로였다. 독일은 작전 계획에서부터 스탈린그라드를 '무력화'하여 볼가강의 운반 통로를 차단해 소련의 전시 경제를 지탱하고 전선의 소련군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물자가 운반되는 것을 막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소련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독일의 계획을 막기 위해 스탈린그라드를 사수해야만 했다.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attachment/battle_stalingrad103.jpg|width=100%]]}}} || || [[시가전]]의 주역인 62군, 64군을 예하부대로 둔 스탈린그라드 전선군 고위 지휘관들[* 맨 왼쪽이 [[니키타 흐루쇼프]] 중장(정치장교), 키르첸코 소장(정치장교), 추야노프 소장(정치장교), 맨 오른쪽이 전선군 사령관 예료멘코 대장. 스탈린그라드에 있던 독일 국방군의 제6군을 포위한 직후인 1942년 12월 1일 촬영.] || 1942년 8월, 스탈린은 스탈린그라드 전선군 사령관에 티모셴코 대신 [[안드레이 예료멘코]] 상장을 임명했다. 티모셴코가 무능한 건 아니었지만 [[독소전쟁]] 이래 패배가 따라다니던 그에게 스탈린그라드의 방어를 맡긴다는 것은 왠지 꺼림칙했기 때문이었다. 예료멘코는 독소전쟁 이후 부상을 두 번이나 당했으나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기에 스탈린은 그를 전선군 사령관으로 내려 보낸 것이다. 그리고 예료멘코의 [[정치장교]]는 후대에 서기장으로 임명되는 [[니키타 흐루쇼프]]였다. 전선군의 예하 부대로서 스탈린그라드 시내에는 62군과 64군이 배치되어 있었다. 흐루쇼프와 추이코프의 회고에 따르면, 62군의 사령관 [[https://en.wikipedia.org/wiki/Anton_Lopatin|안톤 로파틴]] 중장은 예료멘코와의 면담에서 매우 소극적이고 패배주의적인 언동을 보였다고 한다. 이런 패배주의자를 데리고는 도저히 스탈린그라드를 수비할 수 없다고 판단한 예료멘코는 64군 사령관 [[바실리 추이코프]]를 62군으로 옮기고 21군 사령관이었던 [[http://encyclopedia2.thefreedictionary.com/Mikhail+Stepanovich+Shumilov|미하일 슈밀로프]] 중장[* 이상하게도 슈밀로프는 [[시가전]]에서 추이코프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임무를 맡았는데도 서방 전사에서는 거의 언급이 안 된다. 1996년 1월호 [[월간조선]]에서 스탈린그라드(볼고그라드) 전적지 탐방 기사를 냈는데 러시아인들은 이런 이유에 대해 슈밀로프가 손실을 최소화했기 때문에 격전에서 언급이 잘 안 된다고 대답했다고 한다.]을 64군으로 전임시켰다. >한편 62군 사령관이 스탈린그라드 전선사령관을 기만한 것으로 드러났는데 당시 전선사령관은 예료멘코 장군이었다. 따라서 스탈린그라드를 방어하라고 했더니 달아나기만 한 62군의 사령관으로 새로운 사람을 임명해야 했다. 그 시점에 나는 추이코프 장군에 대해서 매우 좋은 인상을 구축한 상태였다. 우린 스탈린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가 물었다. "62군 사령관으로 누구를 추천하겠나? 누가 도시를 지키는데 알맞겠는가?" 내가 대답했다. "바실리 이바노비치 추이코프입니다." >---- >흐루쇼프 회고록 1권. >로파틴 장군으로 말하자면, 나는 그가 자신감있는 마음가짐과는 거리가 먼 상태였다고 의심하였다. 그는 부지노프카의 적 군세를 물리치는 것에 대한 희망을 전혀 갖지 못했다. 그는 우측면에서 반쯤 포위된 그의 병력들이 버틸지에 대해서 의심했다. (...) 62군 사령관 로파틴 장군은 그의 군대가 도시를 사수할 수 있으리라고 믿지 않았다. 사생결단으로 싸우기보단, 적을 볼가강에 접근하지 못하게 죽기살기로 싸우기보단, 그는 그저 병력을 계속 철수시키는 것으로 대응했다. 그 때문에 그는 직무에서 해임되었으며 62군은 임시로 참모장 [[니콜라이 크릴로프]] 장군이 지휘하게 되었다. >---- >바실리 추이코프, The Battle For Stalingrad 반면 [[게오르기 주코프]]는 로파틴에 대해서 높이 평가하는 기록을 회고록에 남겼다. 주코프와 추이코프가 사이가 매우 안 좋았기 때문에 추이코프의 공적을 깎아 내리기 위해 주코프가 이렇게 써 놨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참고로 로파틴에 대해서 주코프는 정확히 이렇게 적었다. >8월 30일에 이르러 남동전선의 병력들은 적군의 압도적인 숫자에 밀려 외곽 방어선으로, 그 다음에는 내부 방어선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 그 시점에 62군은 A.I. 로파틴 중장이 지휘하고 있었는데, 그는 62군이 적군에 압도적인 중과부적에 처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군인으로서 해야 할 모든 의무를, 그리고 그 이상을 수행하였다.''' 1942년 9월 10일부터 62군은 추이코프 중장이 지휘했다. >---- >Georgy Zhukov, Marshal of Victory: The Autobiography of General Georgy Zhukov. 로파틴은 사령관에서 보직해임된 후에도 한동안 스탈린그라드 근처에 머물렀는데, 흐루쇼프는 이것이 군 사기에 악영향을 끼친다고 판단해 그를 후방으로 전속시켰다는 이야기도 회고록에 써놨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